정약용 선생, 30문답
정약용과 문화제정약용 선생, 30문답
꿈꾸는 지식인 다산 정약용
정약용은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 보면,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재마을입니다.
1762년(임오년)입니다. 그 해는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하는 참극(‘임오화변’)이 벌어진 해였습니다.
압해 정씨 정재원(1730~1792)입니다. 정약용의 집안은 8대에 연이어 홍문관 관리를 역임했습니다. 홍문관은 ‘옥당’이라고도 불리는 중요한 기관이었습니다. 정약용 집안을 ‘8대 옥당 집안’이라 불렀는데, 이는 명예로운 칭호였습니다. 한동안 벼슬이 끊겼지만 아버지 정재원은 진주목사를 지냈습니다.
해남 윤씨(1728~1770)입니다. 이름은 ‘윤소온’으로 알려져 있고, 윤선도의 6세손이며, 윤두서의 손녀였습니다.
5남 3녀 가운데 넷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맏형 정약현은 이복형제로 의령 남씨 소생입니다. 그의 첫 부인은 ‘이벽’의 누이였는데, 이벽은 조선에서 처음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인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딸은 황사영과 혼인했습니다. 둘째형 정약전과 셋째형 정약종 정약용과 같이 해남 윤씨 소생입니다. 정약종은 신유년(1801년)에 순교했습니다. 누이는 이승훈과 혼인했는데, 이승훈은 조선에서 최초로 천주교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서모 김씨 소생으로 정약횡과 두 여동생이 있었습니다.
15세에 한 살 위인 풍산 홍씨와 결혼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홍혜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홍씨는 병마절도사를 역임한 홍화보의 딸이었는데, 남인계의 집안이었습니다. 유배로 헤어진 기간도 있었지만 정약용이 죽을 때까지 60년을 함께 살았습니다.
6남 3녀를 낳았는데, 4남 2녀를 잃었습니다. 요절한 원인은 대부분 천연두 때문이었습니다. 정약용이 「마과회통」을 지은 간절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성장한 2남은 학연과 학유이고, 딸은 강진으로 시집갔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0세에 아버지에게서 경서와 역사서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이익의 종손인 이가환 등을 비롯한 남인계 소장학자들과 어울렸습니다. 자연스럽게 이익의 유고를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는 이익의 유고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정약용은 22세에 진사과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갔습니다(1783). 여기서 정조을 처음 만났고, 성균관에서 생활하다가 28세에 대과(문과)에 합격하여 벼슬길로 나아갔습니다.
33세에 경기 북부의 암행어사로 활약했습니다. 이때 백성의 궁핍한 실상과 관의 혹독한 중간 착취를 목격하고 시로 기록했고, 왕실의 권위에 의지해 탐학한 관리를 징계하도록 요구했습니다.
그가 성균관 생활을 하던 23세 때(1784), 한강 두미협 부근을 배를 타고 지나던 중, 함께 가던 이벽으로부터 천주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 이후로 천주교 서적을 빌려서 보면서 천주교에 빠져들었습니다.
1785년 봄에 을사추조적발사건(일명 명례방사건)이 있었습니다. 김범우 집에서의 의식을 하던 모임이 형조의 포졸들에게 발견된 것입니다. 이때는 정치쟁점으로 비화되지 않았으나 신해년(1791년) 발생한 진산사건으로 천주교 문제는 정치쟁점으로 비화되었습니다. 진산사건은 전라도 진산에서 윤지충·권상연이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천주교에 감화되었던 정약용은 진산사건(1791)을 계기로 천주교와 관계를 끊었습니다. 천주교 쪽에서 제사를 금지하고 나라에서 천주교를 금했기 때문에, 유학을 따르고 관리의 신분이었던 정약용은 태도를 바꾼 것입니다. 36세 때 동부승지로 임명되었을 때(1797), 사직상소를 올리면서 자신이 천주교도라는 비방에 대해 변론했습니다. 즉 젊었을 때 천주교에 빠졌지만, 진산사건 이후 천주교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고, 지금은 뉘우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후 정조는 정약용이 천주교의 비방에 시달릴 때, 정약용을 비방하는 자를 벌하거나 정약용을 잠시 지방으로 좌천시키기도 했습니다. 지방관으로 보내어, 그를 보호하는 한편 지방행정 경험의 기회를 주기도 했습니다.
정조가 갑작스럽게 죽자, 어린 순조가 즉위하고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했습니다. 이때 조정은 노론벽파가 장악하고 있었고, 이들은 신유옥사를 일으켜 자신의 반대세력을 제거하고자 했습니다. 제거하고자 했던 세력은 다양했는데, 채제공 세력으로 분류된 이가환, 정약용 등이 주요 표적이었습니다.
첫 유배지는 경상도 장기였고, 다시 옮긴 유배지가 전라도 강진이었습니다. 정약용은 1801년 2월 9일 새벽에 붙잡혀 투옥되었다가 겨우 목숨을 건져 27일 밤에 출옥하여 장기로 유배되었습니다(사암연보). 3월 9일 장기에 도착하여 유배생활을 시작했는데,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10월 20일 저녁에 다시 체포되어 27일에 투옥되었습니다. 11월 5일에 강진 유배 결정이 나서 늦게 출옥했습니다.
신유옥사로 정약용과 같은 운명이었던 둘째형 정약전은 처음엔 전라도 신지도에 유배를 갔다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조사받은 후로는 전라도 흑산도로 유배를 갔습니다.
1810년 그의 아들이 징을 울려 원통함을 호소하여, 벼슬 없이 고향에 돌아가게 하는 벌로 낮추었으나(순조 10년 9월 21일), 반대가 있어 유배가 풀리지 못했습니다. 1814년 죄인 명부에서 삭제되어(순조 14년 4월 9일) 해배(유배에서 풀어줌) 관문(동급 또는 하급 관에 보내는 공문서)을 보내주려 했으나, 또 반대가 있어 유배가 풀리지 않았습니다. 1818년 부응교 이태순이 상소하여 문제점을 지적하자 우의정 남공철이 의금부를 책망했습니다(순조 18년 5월 25일). 마침내 8월에 해배 관문이 보내져, 1801년 11월 하순에 강진에 와서 1818년 9월 초에 강진을 떠나 고향길에 오르니 18년에 걸친 유배생활이 마감되었습니다.
‘묘지명’이란 죽은 이의 삶을 칭송하여 적은 글입니다. 그런데 정약용은 죽기 전에 스스로 자신의 묘지명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자찬’묘지명이라고 합니다. ‘자찬묘지명’에는 60년의 인생을 돌아보며 새로 태어난 느낌으로 여생을 잘 마무리하겠다는 다짐이 담겨 있었습니다. 또한 정약용은 자신의 삶에 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왈가왈부하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컨대 자신이 천주교도인지 아닌지에 관해서 지금도 엇갈린 말이 있습니다. 정약용은 천주교도로 몰려 죽은 사람 가운데 몇 사람의 묘지명을 써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죽었다는 점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1836년, 회혼일인 2월 22일(양력 4월 7일), 회혼을 축하하기 위해 가족들이 모인 가운데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세 저서를 ‘1표2서’라 부릅니다. 「경세유표」(1817)와 「목민심서」(1818)는 각각 48권으로 유배 기간 막바지에 저술했고, 57세 때 해배되어 고향집에 돌아와 「흠흠신서」(1819)는 30권을 저술했습니다. 「경세유표」는 국가 제도 개혁론이고, 「목민심서」는 지방 수령의 행정 지침서이고, 「흠흠신서」는 형사 참고서입니다.
제도가 오래되어 폐단이 발생하고 그냥 두어서는 나라가 망할지도 모르겠다는 위기의식에서, 국가 제도를 개혁하여 나라를 새롭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신아지구방’). ‘경세’란 나라를 경영한다는 뜻입니다. ‘표’란 신하의 입장에서 왕에게 바치는 국가 경영의 계책인데, 죽은 뒤에라도 받아들여지기를 기대하는 간절한 마음에서 ‘유표’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정약용은 ‘현행법에서라도 우리 백성을 살려내려는 뜻’으로 '목민심서'를 편찬했습니다. 현행 법제로라도 백성들을 직접 접하는 수령들이 각성하여 훌륭한 정사를 편다면, 백성들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목민심서」는 모두 12편으로, 제1편 부임, 제12편 해관입니다. 그 사이에 목민관의 덕목인 율기·봉공·애민을 제2~4편으로, 이전·호전·예전·병전·형전·공전의 육전에다 진황을 더해 제5~11편으로 편성했습니다. 각 편은 각각 6개 조로 구성되었습니다. 또 정약용의 관직 경험, 한국과 중국의 수많은 사서·경전·법전 등에 담긴 목민에 관한 자료, 선행 목민서 등이 망라된 지방 정치와 행정에 대한 내용이 종합적으로 저술되어 있습니다.
정약용은 인명을 다루는 옥사라 잘해야 하는데, 옥사를 잘하는 관리가 적음을 걱정했습니다. 형사에 관한 내용을 정리하여, 궁극적으로는 억울한 옥살이로 피해를입는 백성들이 없기를 바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정약용의 저서는 필사본으로 전해지기도 하고, 일표이서(「경세유표」, 「목민심서」, 「경세유표」를 말함)가 개별 출간되기도 했으나, 전체가 완간된 것은 1938년 신조선사에서 간행한 「여유당전서」가 처음이었습니다. 30년대 조선학 운동이 전개되던 무렵, 마침 1936년이 정약용 서거 100주년이 되어, 그 기념사업으로 「여유당전서」 76책을 편찬·발간했던 것입니다. 1975년에는 출간 이후 발견된 저술들을 모아 영인한 「여유당전서보유」 5책이 간행되었습니다. 이후 다산학술문화재단에서 정본화 사업을 한 결과 2012년에 「정본 여유당전서」가 출간되었습니다.
정약용은 「기예론」에서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라 지려와 교사를 활용하여 도구를 만들고 기술을 개발할 능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많을수록 기예가 더욱 공교해지고, 세대가 내려올수록 기예가 더욱 공교해진다고 했습니다. 적극적인 기술의 도입과 개발을 주장하여, ‘이용감’이라는 전담 기구를 신설하자는 주장도 했습니다. ‘이용감’이란 용어는 ‘이용후생’에서 빌린 것입니다.
잘 알려진 다산 이외에, 여유당, 열수, 사암 등이 있습니다. ‘철마산초’라는 호도 있고, ‘철마산의 나무꾼’이라는 뜻으로 철마산은 정약용의 남양주 고향 집 근처 산입니다.
정약용이 강진 유배시절 후반 10년 동안 기거했던 곳은 주위에 차가 많이 자라고 있어 ‘다산’이라고 불렀습니다. 그의 학문적 업적이 대부분 이곳에서 이루어졌기에 후학들이 그를 ‘다산’이라 불렀습니다.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뜨고 나서,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지은 당호입니다. 노자의 글 “여혜, 겨울 시내를 건너듯, 유혜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듯” 이란 구절에서 이름을 따왔습니다. 용기만 있지 지모가 없으며, 선만 좋아했지 가릴 줄 몰라서 그만둘 일도 그만 두지 못하는 것이 정약용 자신의 약점이라고 반성했습니다. 그래서 겨울 시내를 건너지 않듯 부득이한 것이 아니면 그만두고, 부득이한 경우라도 두려움이 있으면 그만두는 것이야말로 자신에게 약이라는 의미입니다.
정약용은 고증을 통해 문헌에 나오는 ‘열수’라는 것이 한강을 가리킨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호는 자신이 거처하는 지명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강변에 사는 자신을 부르는 호칭으로 열수라는 호를 사용했습니다.
정약용은 회갑 때 지은 「자찬묘지명」에서 자신의 호를 ‘사암’이라 했습니다. ‘사’는 ‘기다린다’는 의미입니다. 「중용」 29장에 “백세 이후 성인을 기다려도 미혹됨이 없다” 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는 학문적 자부심일 수도 있고, 훗날 자신의 뜻을 공감해 주길 기다리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고, 두 가지 의미 다일 수도 있습니다.

[출처] 김태희, 「정약용의 삶과 글」, 2019, 실학박물관, 155~1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