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설명
1. 정약용유적지 - 여유당 (정약용 선생의 생가)

정약용 선생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아 백성의 삶을 돌본다.’는 학문적 목표를 향해 열정을 다하였다. 법, 과학, 문학, 교육, 철학 등 다방면에서 빼어난 그는 위민(爲民) 정신을 실천하며 더 나은 세상을 꿈꾸었다. 선생이 나고 자랐으며 말년을 보낸 이곳에서 선생의 정신과 자취를 만나볼 수 있다.
여유당(與猶堂)은 정약용 선생의 당호이다. 여유(與猶)는 선생이 1800년(정조 24) 봄에 모든 관직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서 지은 것으로,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세상을 살아가려는 의지가 담겨있다. 앞에는 큰 강이 흐르고 뒤에는 낮은 언덕에 꽃과 나무가 어우러져 ‘채화당(菜花堂)’이라는 또 다른 명칭도 갖고 있다.
현재의 여유당은 1925년에 일어난 ‘을축년 대홍수’로 유실되었던 것을 선생의 사후 150주년이 되는 1986년에 복원한 것이다. 다시 지으면서 ‘여유당 중건 상량문’을 적어 대들보에 걸었다. 여기에는 선생의 생애와 업적, 당호의 의미 등이 기록되어 있다.
2. 정약용유적지 – 묘소 (정약용 선생의 묘)

정약용 선생은 환갑을 맞은 1822년 스스로의 생애와 사상·업적을 정리하여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지었다. 선생은 자신에 대하여 선(善)을 즐거워하고 옛것을 좋아하며 실천에 과단성이 있었다고 자부하였다. 이는 묘소 입구의 비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정약용 선생은 돌아가시기 전에 ‘집 동산에 매장하고 지관에 묻지 말며, 석물은 지나치게 세우지 말라!’라고 자식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풍수지리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고향마을 생가 뒤에 묻히기를 바랐던 것이다.
1836년 75세인 정약용 선생은 결혼 60주년 회혼일에 여유당에서 돌아가셨다. 여유당 뒤편 묘소에 부인 풍산 홍씨와 함께 합장되어 있으며 이 묘역은 1972년에 경기도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었다.
3. 정약용유적지 – 기념관 (정약용 선생의 업적 전시관)

기념관은 정약용 선생의 저술과 업적을 알리고 선생의 고결한 뜻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축되었다.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제자에게 보내는 경계의 글,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 선생의 대표적인 저술의 사본 등이 전시되어 있다. 실학 정신을 바탕으로 선생이 설계에 참여한 수원화성의 건축 장면을 모형을 통해 볼 수 있다.
기념관 옆 문화관에는 〈정약용의 향기로 그린 풍경〉을 주제로, 2020년 공공미술프로젝트를 전시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지역 예술작가와 지역 공동체가 함께 정약용 선생의 삶을 예술로 재해석하여 표현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4. 마재마을 (정약용 선생의 고향)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위치한 마재마을은 유네스코에서 ‘2012 세계기념인물’로 지정한 정약용 선생이 태어나 자라고 생을 마친 곳이다.
정약용 선생은 이곳에서 강변을 한가롭게 산책도 하고 때로는 버드나무 아래에서 계절의 향기를 맡고 풀벌레 소리 들으며 책을 읽기도 하고, 손님이 찾으면 한강에서 잡은 농어로 상을 차리고 세상을 담론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정약용 선생은 이곳 고향마을에서 500여 권의 저술을 고치고 또 고쳐 완성하였다.
마재(마현)이라는 이름은 정약용 선생이 유래를 밝히고 마을 이름도 붙였는데, 마을에 있는 쇠말산 산등마루에서 쥐 만한 크기의 쇠로 만든 말이 출토된 데서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마재마을은 경기평해옛길로 지정되어 있다. 정약용 유적지, 실학박물관, 다산생태공원, 그리고 물의정원과 수종사까지 한강길을 따라 이어지는 경관이 매우 빼어나며 예나 지금이나 역사의 숨결이 오롯이 담겨있는 곳이다.